동방의 유학자 하서 김인후  영세 흥왕의 터를 잡은 하소부인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1 단종에 충효를 다하신 손암 김신덕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2 남문창의 맹주로 활약한 오천 김경수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3 임진란에 종군하신 취옹 김남중
단종에 충절한 복양제 김수노 삼양사 창립등 대사업가 수당 김연수
명.황제를 감동시킨 백암 김대명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 가인 김병노
진주성에서 순절한 판관 김천록 한국 지성의 거목 남제 김상협
현대사의 거인 인촌 김성수 추효업적을 이룩한 맥촌 김형지
세계의 언론인 일민 김상만 학문, 덕행, 효를 다하신 선조들
과거에 급제하신 선조 사환들 호남 여인열전 여흥민씨부인
난중에 정절을 지킨 열녀 할머니들  갤러리 게시판
너는 커서 河西가 되라

 명나라 황제를 감동케하신 휘 대명(大鳴)

22세 號:白巖(백암) 諱:大鳴(대명)
1536년 진주에서 출생하시어 1603년 68세에 서거하심.
어릴적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10세 때 이미 부모 섬기는 예절을 다 하셨으며,
18세때 경상도 관찰사가 진주에서 시행한 백일장에서 장내에 운집한 영남지역의 노숙한 명인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장원을 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관찰사는 곧 큰 잔치를 베풀어 특별히 표창을 하였다.
당시의 巨儒 河卞(하변)은 "백암의 문장이 海內雄(해내웅)이다". 사마시 동방인 령상 이산해는 "백암의 문장은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따를자가 없다"고 그찬하였다.

23세때 사마시에 합격 하였으며,33세때 의금부도사를 지내시고,35세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곧 성균관 전적으로 임명되었으나 년노하신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하여 향리에서 가까운 사천현감을 자청하여 매일 70리길을 왕복 통근하시면서도 한 번도 정성의 예가 빠진일이 없의셨다.
그후에 예조 정랑으로 임명되어 42세인 1577년에 宗係辦誣使(종계판무사)의 일행으로 書狀官(서장관)이 되어 중국에 가셨을때 명나라의 神宗皇帝를 專對(전대)하여 상명한 이론과문사가 밝고통달하며 법과 도리에 맞는 기거 동작에 감동하여 신종은 옥룡련(벼루)와 묵화병풍등 고귀한 선물을 주어 그 명성이 중원천지를 진동케 하엿다.
귀국후 조정은 당정에 휩쓸려 혼란이 거듭되므로 동서분당의 징조가 보이자 이적을 자청하여 괴산군수와 풍기군수등을 지내며서 많은 치적을 남기시고 최후로 봉산 군수로서 관직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수하면서 노계를 삼으셨다.

진왜란이 일어나자 국운의 위태로움을 통탄하고 학봉 김성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600여명의 장정을 모아 고성,웅천,김해,창원에 이르러 매복 유인하여 격퇴하는등 찬연한 공을 세워 盡忠報國(진충보국)의 의기를 드높였다.
68세인1603년 고향으로 돌아와 손수 洞規(동규)를 지어 7년 전화로 흩어진 주민들을 다시 규합하고 해이한 기강을 바로잡고 예속을 바로 잡으며 노력 하시다가 세상을 버리셨다.
옥룡연은 우리 문중의 가보로 보전되고 있으며 묵화병풍은 공의 종손며느리에게 주어 재령 이씨 문중에서 가보로 전해지고 있다.

남 진주 대각서원에 배향되고 묘역 정화사업도 이루어 졌고,유고로는 백암 문집이 남아있고 모든 문헌은 임진왜란때 소진되어 후세에 전하지 못함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경남 진양군 수곡면 사곡리 大覺書院(대각서원)에 배향하시다.묘는진주 천곡 酉坐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