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유학자 하서 김인후  영세 흥왕의 터를 잡은 하소부인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1 단종에 충효를 다하신 손암 김신덕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2 남문창의 맹주로 활약한 오천 김경수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3 임진란에 종군하신 취옹 김남중
단종에 충절한 복양제 김수노 삼양사 창립등 대사업가 수당 김연수
명.황제를 감동시킨 백암 김대명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 가인 김병노
진주성에서 순절한 판관 김천록 한국 지성의 거목 남제 김상협
현대사의 거인 인촌 김성수 추효업적을 이룩한 맥촌 김형지
세계의 언론인 일민 김상만 학문, 덕행, 효를 다하신 선조들
과거에 급제하신 선조 사환들 호남 여인열전 여흥민씨부인
난중에 정절을 지킨 열녀 할머니들  갤러리 게시판
너는 커서 河西가 되라

 남문창의 맹주로 활약하신 휘 경수(景壽)

22세, 號:鰲川(오천) 諱:景壽(경수). 字:백형
1543년 출생,1621년 78세로 영면하심.어릴 적에 백부 逝水軒公(서수헌공)에게서 수학 하시고 자라서 문정공 문하에 나아가 성리학을 배우시고,명종 15년 문정공 서거에'태산이 무너지니 나는 장차 어찌 우러를 것인가"라는 제문을 지으시니18세 때 일이다.어려서 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총명하여 깨침이 남달리 빠르고 글을 배우기 시작하자,"책에는 쓸데 없는 교훈이란 없고,선비에게는쓸모 있는 마음이 있다"라는 말을 지었다.율곡 우계 문하에도 나아가 학문을 익히시고 고제봉,정송강,노옥계등 당대의 명유와도 교유 하시었다.

1576년친상을 당하자 장례 절차를 한결 같이 가례를 따르고 묘소가 노령산맥 깊은 산골짜기에 있어 본디 호랑이가 사람을 해치는일이 많았으나,공께서 시묘하시자 짐승의 자취가 보이지 않게되어 마을 사람들이 "효자가 오니 맹수가 갔다"고 칭송했다.

1580년 선조13년 건원릉 참봉에 薦授(천수)되었으나 학문의 부족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으셨다.종형 부제학공의 권유에"권세있는자리에 사람이 빠짐이 마치 함정에 짐승이 빠짐과 같은데,제가 어찌 명리를 위하여 조급히 나아가겠습니까"라고 답하셨으니,그고결한 인품의 일단을 능히 알수 있다.

1581년 선조14년에 內膽寺(내담사) 奉事(봉사) 掌樂院(장락원) 主簿(주부)에 제수 되었으나 때마침 삼찬(三簒:송은개,박근원,허봉)이 율곡을 논박하니 사람의 화가 이에서 싹틈을 탄식하고 물러나 향리에 은거 하며 학문연구와 후학지도에 전념 하였으며.

1591년
선조24년에 정송강의 추천으로 예조좌랑에 제수 되었으나 송강이 강계로 귀양 가는 일이 일어나 취임하지 않고 은거 하시던중 임진 왜란이 일어 났다.
고제봉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家童(가동) 20여인과군량과 화살 등을 보내 도왔으며, 금산에서 순국하였다는 비보를 접하고 분연히 일어나 ,종제 신남(信男)과 아들,극후,극순을 데리고 장성 남문에 나가 창의를 결의 하고 호남 열읍에 격문을 보내고 남문에 의병 도청을 설치하였다.
격문에 응하여 고부의 김제민,군내의 정운용,영광의 이응종,고창의 김홍우,태인의 정수일,담양의 이언조,나주의 김경남,등 19개 주군에서70여 의사(승장 9명 포함)가 의병과 군량을 가지고 모여들어 ,11월 17일에단을 만들고 軍會(군회)를 열어오천공을 맹주로,김 제민을 의병장으로추대하니 병력 1651인에 군량496섬 이였다.
11월 18일 兩湖體察使(양호체찰사)로 호남에 내려온 송강에게 1300여자에 달하는書狀을 올리고 時務策(시무책) 10조를 건의 하시었다.
11월 24일 드디어 대오를 정비하고 北을 향해 진군하여 천안,직산,진위,안성,용인,등지에서 적을 대파 하였다.한편 군량 300석과 細布 15필을 의주 행재소에 보내고 또100섬을 영남의 곽재우장군 진중에 보냈다.

1593년 선조26년 계사 5월29일에 남문에서 다시 읍병 300명과 김홍우형제,김언희,윤황,판관(신남) 내금위(인휘),극후,극순등의 의병을 합쳐 836인의 병력과 692섬의 군량으로 대오를 갖추엇다. 6월3일에 출진,남원,함양을 거쳐 진주에 이르러,복수장 고종후군과 합류하여 진주성에서 처절한 혈전으로 을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6월29일,성은 함락되고 내금위공,극후,극순공을 비롯제장이 장렬하게 순국 하시었다(남문 창의군도 생존자가 하나도 없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남문에서 의병청을 열어 의병 700여면과 군량 수백섬을 모아 8월19일 판관공,김홍우형제,김중기,김성진,박안동,김국서등 제장을 출진시켜 소사,안성,까지 나아가 적을 대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오천공은 임진.정유란의 7년간 비록노령으로 전선에나아 가시지는 않았으나,후방에서 지속적으로 모병하고 군량을 모아,전후세번이나 기병하여 출전시켜 왜적을 격파,국난을 극복하는 데 큰공을 세우시고 두아들을 받치셨습니다.

亂이 평정된 후 선조32년에 軍資監正(군자감정), 선조34년에 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同知義禁府事등 관직이 내렸으나 一切 나아 가지 않고 田里에서 琴書(금서)를 벗하며 여생을 마치셨다.
장성 사거리에 남문창의의 사적을 찬양한 창의비(대제학 耳溪 洪良浩撰)가 있다.
鰲川集 2권이 전한다.晦溪祀(회계사),鰲山祀(오산사)에 배향 되시다.묘는 장성군 북하면 부귀촌 丙坐原이다.

*남문 창의에 동참하신 할아버지들

1.내금위장 諱인혼공
흥려군의 5대손.문정공의 종재이며 오천공의 4종제이시고 태어나시면서 英邁(영매)하셨고 자라시면서담략이 있다는 칭을 들으셨다.
남문 창의에 참여 하시어 많은 의병과 군량을 힘써 모으시고 계사년에 두분 4종질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고종후 장군과 합세하여 진주성에서 용전 분투 하시고 6월29일 성이 함락되자 북향 재배하고 남강에 투신,순국 하셨습니다.
배향:회계사,오산사

2.판관 諱 신남공
흥려군 5대손.오천공의 종제로 남문창의에 처음부터 참획하시어 임진년에 용인까지 진군,다대한 전공을 세우고 계사년에 진주성에서 복수장과 합세하여 싸우던중,군량,군기를 모으러 출성한 사이 성이 함락되어 귀환 하시었습니다.정유재란에 다시 남문에서 출진,안성에서 적 수백을 살상하는 공을 세워 선무원종훈 에 올랐다. 배향: 오산사.

3.참봉극후.교관 극순공
참봉군은 오천공의 큰아드님,교관공은 둘째 아드님으로 남문창의에 아버님을 도와 시종 참획하시고 병약하신 아버님을 대신하여 김 오봉과 함께 용인까지 진군 하셨고,계사년에는 4종숙 내금위공과 함께 진주성에서 싸우고 성이 함락되자,남강에 투신 순국 하셨다.
향: 오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