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유학자 하서 김인후  영세 흥왕의 터를 잡은 하소부인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1 단종에 충효를 다하신 손암 김신덕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2 남문창의 맹주로 활약한 오천 김경수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3 임진란에 종군하신 취옹 김남중
단종에 충절한 복양제 김수노 삼양사 창립등 대사업가 수당 김연수
명.황제를 감동시킨 백암 김대명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 가인 김병노
진주성에서 순절한 판관 김천록 한국 지성의 거목 남제 김상협
현대사의 거인 인촌 김성수 추효업적을 이룩한 맥촌 김형지
세계의 언론인 일민 김상만 학문, 덕행, 효를 다하신 선조들
과거에 급제하신 선조 사환들 호남 여인열전 여흥민씨부인
난중에 정절을 지킨 열녀 할머니들  갤러리 게시판
너는 커서 河西가 되라

 湖南여인列傳 驪興閔氏부인

자식들에 忠孝심어...家門中興

城의 蔚山金氏하면 長城은 물론 全羅道 일대에서 명문가로 손꼽히는 家門이다.
전라도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河西 金麟厚(1510--1560)를 배출한 이 집안이 장성에 터를 잡은 것은 여흥민씨부인이라는 뛰어난 인물에 연유한다.

서의 오대 조모가 되는 민씨는 무학대사로부터 전수받은 도참설을 알기 쉽게 풀이한 "荷沼訣"을 지은 인물로 그가 장성에 터를잡은것은 풍수지리에 밝았던 때문으로 추측되고 있다.
驪興閔氏는 蔚山金氏의 중조격인 金穩(1348--1413)의 부인.그는 朝鮮朝 三代王인 太宗 李芳遠의 부인인 元敬王后와 사촌간이었다.

穩은 蔚山金氏 시조 金德摯의 17世孫으로 젊은시절 李成桂의 위화도회군때 종군했고 朝鮮朝가 건국된 後에는 密陽府使 와 楊州牧使를 지냈다.

은 太宗의 妻男인 閔無奇와 閔無疾의 옥사에 관련해 사약을 받았다. 閔氏는 남편이 세상을 뜨자 세 아들 達根,達源,達枝를 데리고 長城郡 黃龍面 麥洞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그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長城으로 오게된 것은 그 이유가 확실치 않지만 金穩 이전의 선조들이 전남에 뿌리를 내리고 산 연고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金氏 집안 에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閔氏가 三兄弟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全羅道로 갈까.혹 慶尙道로 갈까망설이다가 "네자손이 전라도로 와야 겠다"생각하고 長城 갈재에 이르렀다.

재에서 대추나무를 꺽어 목매 3 마리를 만들었다.
목매를 휙 날리자 한마리는 北二面 鳴鼎里에 와서 앉고 나머지는 黃龍面 麥洞과 지금의 筆巖書院자리에 내려 앉았다. "내가 죽으면 鳴鼎里에 묻어다오.그러면 말탄 子孫이 앞 들판에 하나가 될것이다.또 자손중에 賢人이 나면 기필 筆巖이 書院터가 될것이다." 그의 예언은 무섭도록 적중 했다.
아무연고 없이 정착한 長城에서 蔚山金氏는 명문가로 성장했고 河西를 비롯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며,筆巖書院이 세워졌으니 말이다.

氏가 이처럼 정확한 예언을 할수 있었던것은 그가 風水地理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기 때문.
그의 아버지 閔亮이 漢城 判尹으로 있을때 無學 大師에게서 도참설을 전수 받았을것으로 추측된다. 麥洞에 정착한 閔氏는 어려운 살림을 꾸려 가면서도 세 아들의 교육에 힘썼다.
당시 맥동은 南陽洪氏가 대단히 울리고 사는 곳 이었다.

氏의 큰아들 達根은 公州 李氏와의 사이에 律을 두고 있었으나 長城에 와서 洪氏를 맞아 들여 다시 두아들을 낳았다.閔氏는 평소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남들이 무슨말을 해도 시비 하지 말아라""남에게 평소 덕을 베풀고 혹 성을 내면 고개를 숙이고 있으라"고 했다.

3兄弟 또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 했는데 민씨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孝性이라 하는것은 국가의 중추가 되고 나라일을 바로 잡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 名門에 오르는 것이지 비위를 맞추는 것이 결코 孝가 아니니라" 민씨부인은 항시"도의에 벗어나면 인간이 아니다"며 忠節을 가르쳤다. 나라에 큰 흉년이 들자 벼 천석을 싣고가 長城 일대에 곡식을 풀어 구휼했다. 그 곡식이 나중에 수천석이 되어 그 재산이 19대 까지 보존 되었다고 한다.

씨는 당초 세째 아들 達枝를 慶南 하회로 보냈으나 達枝는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長城으로 돌아오고 말앗다.
그러자 閔氏는 西三面 松峴里에 터를 정해주고 아들과 며느리,손자의 묘자리를 모두 잡아주면서 말했다."훌륭한 자손이 나올것이다.그리하여 長城에서 생명을 부지하고 살것이다" 그 말데로 達枝의 큰曾孫子 應斗(1492--1552)는 문과에 급제해 광주 목사를 지냈다.
應斗로 인해 蔚山金氏는 명문가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그는 조카되는 河西의 中央 進出에 도움을 주었으며 高敬命을 孫子사위로 맞아 의병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麥洞에서 세거한 둘째아들 達源의 玄孫이 바로 河西.
河西는 조선조 중기의 성리학자로 閔씨夫人이 일찍이 예견한 "賢人"인 셈이다.
閔氏夫人의 명철함을 입증하는 일화가 또 있으니 그의 사촌 동생이 泰仁의 도강 金씨에게 출가했다.閔氏는 그 동생의 묘자리도 잡아주었는데 동생이"형님 자리와 내 자리를 바꿉시다" 고 청했다.그러자 閔氏부인은 말했다."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아라.모든 물건에는 반듯이 임자가 있는것.너의자손이 내 자손보다 하나가 더 많아도 더 많을 것이고 泰仁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촌 동생의 집안은 泰仁에서 제일가는 명문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손들은 閔氏부인을 蔚山金氏 가문을 중흥시킨 선조로 모시고 있다. 閔氏의 무덤은 北二面 鳴鼎里에 있는데 그자리는 長城 제일의 명당이라고 한다. 밥을 안쳐서 솥뚜껑을 덮어 놓았다는 뜻의 "伏釜"자리 라고도 하는데 무덤이 있는 산을 시조 할머니산 이라고 해서 "都先山'으로 부르고 있다. 閔氏의 남편인 김穩의 무덤은 楊州에서 失傳해 버리고 지금은 閔氏의 무덤 왼편에 단을 쌓아 비를 세웠다. 후손들은 해마다 음력 10월 초하루에 시향을 지내는데 全國의 長.中.季派 자손들이 모두 모인다고 한다.
宗孫들은 지금까지도 제사날인 12월 8일 이면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宋京子 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