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유학자 하서 김인후  영세 흥왕의 터를 잡은 하소부인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1 단종에 충효를 다하신 손암 김신덕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2 남문창의 맹주로 활약한 오천 김경수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3 임진란에 종군하신 취옹 김남중
단종에 충절한 복양제 김수노 삼양사 창립등 대사업가 수당 김연수
명.황제를 감동시킨 백암 김대명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 가인 김병노
진주성에서 순절한 판관 김천록 한국 지성의 거목 남제 김상협
현대사의 거인 인촌 김성수 추효업적을 이룩한 맥촌 김형지
세계의 언론인 일민 김상만 학문, 덕행, 효를 다하신 선조들
과거에 급제하신 선조 사환들 호남 여인열전 여흥민씨부인
난중에 정절을 지킨 열녀 할머니들  갤러리 게시판
너는 커서 河西가 되라

 한국 지성의 거목 남제 휘 상협(相俠)

김상협 총리에 대한 일반의 기억은 고려대 총장 시절인 5공화국때 국무총리로의 전격 등장이다.
『막힌 곳은 뚫고 굽은 것은 펴겠다』는 그의 총리 취임사는 재임중 그에 대한 정치적 평가와 상관없이 오늘날까지 정치인의 역할이 과연 무엇인지를 두고 두고 생각케 하는 명언으로 남아있다.
정치학자와 대학 총장으로 상아탑의 자존심과 같은 인물이었던 김총리의 등장은 당시 어수선한 시국 상황과 정통성 문제에 부담을 갖고 있었던 5공 정권에게 민심을 달랠 훌륭한 카드였다.
대학 총장 출신의 국무총리는 김상협 총리가 처음으로, 이후 5·6공 정권은 시국 전환 등이 필요할 때마다 대학 총장들을 총리로 수혈하는 일이 많아졌다. 취임 일성과 달리 그러나 총리 재임기간 그의 업적은 국민적 기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KAL기 사건과 아웅산 폭발 사건 이후 내각 개편때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1년3개월간 총리를 지냈지만 역대 총리들과 별다른 차별성을 보이지 못했다.

남재 김상협 약력
▲ 1920 부안군 줄포면 출생
▲ 1933년 서울 교동초등 졸업
▲ 1937년 경복중 졸업
▲ 1942년 일본 동경대 법학부 졸업
▲ 남만방적(주) 근무(1944~1945)
▲ 고려대 정치학과 조교수, 부교수(1946~1950)
▲ 김인숙여사와 결혼(1947)
▲ 고창군 해리면 삼양염업사 대표(1951~1954)
▲ 문교부 장관(1962)
▲ 동아일보 이사(1966~1970)
▲ 고려대 6대 총장(1970~1975)
▲ 고려대 8대 총장(1977~1983)
▲ 국무총리(1982~1983)
▲ 대한적십자사 총재(1985~1995년)
▲ 고려대 명예총재(1982~1995)
▲ 학술원 회원(1960~1995)
▲ 1995년 2월21일 작고 대전국립묘지 안장
▲ 국민훈장 모란장(70년) 수교훈장, 광화문장(1983년)
▲ 저서 「기독교민주주의·사회민주주의·교도민주주주의」(1963년) 「모택동사상」(1964년) 「지성과 야성」(1980년)

국회에 대해서는 방탄직이요, 행정부에 대해서는 사회(司會)직이며, 국민에 대해선 대독(代讀)직이라는 대통령제하의 총리라는 한계에다 5공 군부의 두터운 벽을 뛰어넘길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는지 모른다. 실제 당시 권력 주변에서는 김총리에 대한 국민적 신뢰와 기대가 커질 것을 우려해 중요한 정책 결정에 의도적으로 소외시키는 일이 없지 않았다고 전한다. 고려대 출신의 이범석 외무부 장관만이 총리실을 자주 찾았을 뿐 나머지 장관들은 총리를 경원시 했다고도 한다.
사실 학계의 신망이 두터웠던 김총리가 도덕적인 흠과 정통성에 문제가 있던 5공 정권에 참여한 것을 두고 당시 그를 따르고 아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60년대 문교부 장관 시절 경복궁을 헐어 호텔을 지으려는 정책에 반대해 미련없이 장관직을 버렸고, 3~4공화국 시절 여러차례 정치 참여를 거절한 것도 주변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민정당 창당준비위원장에 거명된 적도 있지만 이때도 본인이 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생전에 『전대통령이 단 둘이 만난 자리에서 이·장(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인한 어려움을 꺼내면서 「큰일났다」고 민심 수습을 부탁하더라』는 말로 총리 취임 과정을 회고했다.

남재 김상협 총리는 특별한 종교를 갖지 않고 「역사의 신」을 믿은 것으로 유명하다. 김총리의 입각을 이해할 수 있는 단면이다. 여러 종교서적을 두루 섭렵한 남재는 김동길 교수가 선물한 성서를 읽은 뒤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독특한 정치적 힘을 가진 종교다』라고 해석했다. 거시적 눈과 긍정적 사고로 역사를 바라봤던 그의 역사적 신은 우리의 역대 대통령론에서도 그대로 투영됐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 모든 대통령이 저마다 실정도 많았지만 오늘의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있기까지 나름대로 공헌을 했다고 평가한 것이다.
국무총리가 아닌 대통령감으로 생각했던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정치인으로서 큰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대학 교수, 대학 총장으로서 남재가 남긴 발자취는 뚜렷하다. 사실 남재에게 정치는 외도였다. 남재는 9개월여의 문교부 장관과 1년3개월여의 국무총리 시절을 빼고 나머지 30여년을 대학에 바쳤다. 교수 시절 그는 강의 잘하는 교수로 이름을 떨쳤고, 총장 시절 소신 발언으로 주목을 받았다.
50~60년대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그의 정치학 강의에는 타 학교 학생들이 「도강」할 만큼 인기가 있었다 한다. 특히 냉전시대 당시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모택동사상」 과목은 인기 강좌였다. 그가 쓴 「모택동사상」은 이후 정치학계에 공산국가 중국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문을 연 역작으로 평가받았다.
대학 재단과의 특수한 관계에 있기는 했지만 남재는 70년과 77년 두번의 총장 시절 많은 일화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총장 시절 행한 그의 연설은 대학가는 물론 일반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무게를 지녔다.
70년 고대 총장으로 취임할 때 『새 시대의 지도자는 치밀한 지성과 대담한 야성을 지니면서도 능히 그 조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높은 차원의 전인적 인간이어야 한다』는 요지의 취임사는 오늘에까지 「지성과 야성」으로 요약되는 이상적인 대학생상으로 인용되는 유명한 말이다.
유신 등으로 대학가 데모가 끊이지 않을 때 그는 대학 총장으로서 하기 어려운 「학생 동요 이유 있다」는 발언으로 당시 정권의 눈총을 사기도 했다. 이 발언이 문제가 돼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긴 했지만 남재는 기본적으로 투사형이 아닌 화합형 총장이었다. 그를 주변에서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서 황희 정승의 덕성을 찾는다고 말한다.
46년 대학 교수 부임때부터 50년 가까운 지기였던 현승종 전 총리는 『너그러운 인품에 남을 선으로 보는 눈을 가졌고, 생각의 폭이 넓어 포용력을 지니고 도량이 큰 그릇이다』고 평했다. 안병욱 숭실대 명예교수는 『인품은 대단히 신중했고, 대인관계는 온화했으며, 말은 쾌변이었고, 문장은 중후했으며 언제나 중용을 지켰다』고 했으며, 김동길 전 연세대교수는 『남을 비난하거나 욕하는 일이 없었으며, 주변에 항상 화기애애한 것도 그의 후덕한 성격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대학과 총리에서 물러난 뒤 남재는 대한적십자사 총재로서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젊은 교수시절 민선 평양시장이 꿈이라고 말할 만큼 민족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그는 적십자 총재 시절 고향 방문단장으로 평양을 방북했고, 국교가 없던 구 소련 적십자사와 중국 홍십자사와 공식 교류를 성사시켰다. 어려서 고향을 떠난 뒤 6.25전쟁때 고창 해리에서 삼양염업사 대표로 3년간 체류한 것을 제외하고 전북에서 별 다른 활동이 없었지만 완주 명덕 적십자 수련원을 개설하는 등 적십자 총재 시절 직간접적으로 고향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남재 김상협 "어록"
▲「막힌 곳은 뚫고 굽은 것은 펴겠다」 (82년 6월 국무총리 취임사중에서)
▲ 「새 시대의 새로운 지도자는 치밀한 지성과 아울러 대담한 야성을 한 몸에 지니면서도 능히 그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높은 차원의 전인적 인간이어야 한다」 (70년 고려대 6대 총장 취임사)
▲ 「우리에겐 오늘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일도 있고 또 그 내일도 있다」 (71년 휴교 27일만에 문을 연 후 개강 담화에서)
▲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폭풍우가 휘몰아쳐도 대학의 문은 열려 있어야 한다」 (71년 학원 탄압의 휴교령에 맞서)
▲ 「옛부터 큰 제를 올릴 때는 일정한 희생을 제단에 바쳤다. 필요하다면 내가 역사의 제단에 희생이 되겠다」 (75년 총장직을 그만 두기 전)
▲ 「진리 탐구의 무한 과정에는 안일한 휴식이나 비겁한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오직 냉엄한 비판, 치열한 경쟁 그리고 끊임없는 창조가 있을 뿐이다」 (71년 신입생 환영사에서)
▲ 「나는 일체의 기성 신은 믿지 않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러나 나는 역사의 신만은 굳게 믿습니다」 (강의 곳곳에서)
▲ 「접시를 던지면 물동이로 받아라」 (이세기 전의원 회고) 「내가 앞에 서는 데까지 대통령이 한참 기다려야겠지」 (총리 부임전 발을 다친 뒤 청와대 경호실서 지팡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데 대해 미안해 하는 비서들에게)
▲ 「북한 땅에 가두어 두는 시대는 지났고 이제 넓은 세계로 나오게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반공을 내세우기 보다는 탈공을 유도해 나가는 방향으로 우리 정책을 발전시켜야 한다」 (90년 적십자사 기관지 인터뷰에서)

자연인 김상협

남재는 생전에 지인들과 대화를 무척 즐겼다 한다. 항상 밝은 얼굴에 때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모습,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친화력 때문에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대화에 있어선 주로 듣는 편에 속했으며, 사소한 이야기라도 끝까지 들어주는 「넓은 귀」를 갖고 있었다.
남재는 술을 좋아해 그의 술에 얽힌 일화가 많지만 그중에서 「삼해주」 파티가 지인들 사이에 유명하다. 가까운 고대 가족들끼리 남재의 농장에 모여 각 가정에서 빚은 궁중 왕실주인 삼해주를 출품해 품평회 겸 시음회를 열어 참가자들끼리 점수를 매기는 파티를 연초 연례 행사로 치렀다는 것. 하위권으로 밀려난 가정은 옆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풀이 죽는 데 이때 남재는 큰 그릇을 가져와 한데 섞어 한잔씩 돌림으로써 분위기를 풀었다 한다.
대학 일로 바쁜 와중에도 남재는 틈틈이 낚시를 즐겼다. 낚시터에서 자리를 한번 잡으면 결코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한다. 고기가 물면 열심히 잡고 안 잡히면 찌를 바라보며 언제까지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기다리는 성격이었다는 것. 말년에 골프를 즐기기도 했는 데 골프장에서 흔히 쓰는 「나이스 샷」 대신 그는 항상 「잘했어, 좋아 좋아」라는 말을 고집했다 한다.
그와 교우한 사람이 많았던 사실은 그의 기일에 몰리는 사람들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유창순, 이수성, 현승종, 강영훈, 권이혁 총리 등과 가깝게 지냈고, 황산덕·한태연·김준엽·홀일식·양호민·안병욱 교수 등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철승 전 신민당 당수를 비롯, 조남조 전 전북지사, 김현정 전 전주MBC 사장, 정세균 국회의원 등이 도내 출신으로서 가깝게 지냈던 인물들.
남재의 부부애는 각별했으며, 부부의 다정한 모습은 부인 김인숙여사(75)가 쓴 여행기 「세계를 돌아보고」에 잘 드러나 있다. 아들인 김한씨(45)는 대신증권 전무를 거쳐 현재 와이즈 디베이스 사장으로 있으며, 송상현 서울대 법대학장이 맏사위다.
남재의 서거 후 지난해 추모문집 간행위원회가 결성돼 평소 그와 가까웠던 각계 인사 80여명의 글을 묶어(「당산나무의 큰 그늘이여」) 남재의 유덕을 기렸다.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남재는 20여년간 매일 8백자 분량의 일기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격동기 현대사의 비사를 이해하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