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유학자 하서 김인후  영세 흥왕의 터를 잡은 하소부인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1 단종에 충효를 다하신 손암 김신덕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2 남문창의 맹주로 활약한 오천 김경수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3 임진란에 종군하신 취옹 김남중
단종에 충절한 복양제 김수노 삼양사 창립등 대사업가 수당 김연수
명.황제를 감동시킨 백암 김대명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 가인 김병노
진주성에서 순절한 판관 김천록 한국 지성의 거목 남제 김상협
현대사의 거인 인촌 김성수 추효업적을 이룩한 맥촌 김형지
세계의 언론인 일민 김상만 학문, 덕행, 효를 다하신 선조들
과거에 급제하신 선조 사환들 호남 여인열전 여흥민씨부인
난중에 정절을 지킨 열녀 할머니들  갤러리 게시판
너는 커서 河西가 되라

 현대사의 거인 인촌 김 성 수

인촌 김 성 수
현대사의 거인

1955년 2월 24일 서울운동장에서 19발의 조포가 울려 퍼졌다. 관공서와 가정에 조기가 게양되고 묵념 시간도 마련됐다.
「…어진 마음 따슨 손길 길이 두고 못 잊으라 / 온 겨레 마음의 별 인촌선생 그 이름이여」. 시인 조지훈이 쓴 가사에 나운영이 작곡한 조가가 흐르는 가운데 인촌 김성수 선생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함태영 부통령을 위원장으로, 이기붕 국회의장과 김병로 대법원장 등을 부위원장으로 한 국민장의위원회가 구성돼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엄했던 장례식은 바로 파란만장했던 우리의 근현대사에 인촌이 차지했던 비중을 함축적으로 드러낸 장이었다.
일반적으로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같은 각도에서 보더라도 긍·부정의 양면적인 면을 갖는 경우가 많아 일도양단으로 평가하기 힘들 때가 많다. 인촌역시 격동기 역사에 대한 이념적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른 엇갈린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인촌의 위치와 영향력, 이념적 가치에 대한 엇갈린 평가에도 인촌이 남긴 족적 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뚜렷하다. 우리 근현대사를 통틀어서도 한 분야가 아닌 여러 분야에서 인촌 만큼 두루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도 찾기 힘들다.
정치적으로 대한민국 탄생의 산파역을 맡은 뒤 제2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교육 및 사업자로서 고려대와 동아일보, 경성방직의 창립자다. 생전은 물론 유명을 달리한 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까지 정치가·교육자·사업가로서 추앙받을 수 있는 인촌의 굵직굵직한 경력과 업적들이다.

인촌 김성수 약력

▲1891년 고창 출생
▲1908년 군산 금호학교 졸업
▲1914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졸업
▲1915년 중앙학교 인수
▲1919년 경성방직주식회사 설립
▲1920년 동아일보 창간
▲19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
▲1932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교장취임
▲1945년 한국민주당결성
▲1946년 고려대 설립, 민주당 수석 총무
▲1951년 5월~52년 5월 제2대 부통령
▲1955년 병환으로 별세


◇교육자로서의 인촌
인촌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연구자들이라 할 지라도 교육에서 만큼은 인촌의 공을 높이 사는 것 같다. 인촌 역시 여러 분야중에서도 특히 교육에 관심을 두었고, 교육자로 불리우길 원했다 한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사회 첫 발을 중앙학교 인수로 시작했으며, 다른 분야로 사업을 늘릴 때도 학교 일만은 거의 손을 떼지 않았던 사실에서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읽게 한다.
인촌은 일본 유학생활을 통해 일찍이 민족 교육에 눈을 뜬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교육을 통해 근대문명국가로 발전한 일본을 직접 체험한 인촌은 근대적 시설을 갖춘 민족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교육을 통한 실력 향상만이 광복의 길이라는 신념을 유학시절에 갖게 됐다는 것.
1929년부터 1년8개월간 유럽과 미국의 여러 명문대를 돌아보며 대학 설립에 대한 꿈을 확고히 한 인촌은 1932년 당시 경영난을 겪던 민족 유일의 전문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다. 보성전문 당시 6만여평의 부지에 지어진 고딕식 석조건물이 고려대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뛰어난 조직력 사업기반 넓혀
정치적으로 인촌은 잘 알려진 대로 지주 집안의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집안의 경제력은 그가 교육자 혹은 사업가로서 자리잡는 데 큰 힘이 됐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사회 첫 발을 내딛은 중앙학교 인수에서부터 경성방직, 동아일보 설립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는 모두 집안의 도움을 받았다.
중앙학교 인수 당시에 양부로부터 3천 두락의 토지를 받았고, 보성전문 인수때는 생부로부터 5천석 추수의 토지와 양부로부터 5백석 추수의 토지에 6천여평의 대지를 받았다 한다. 자수성가가 아닌 집안의 경제력이 인촌을 있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부유한 집안이었던 배경 만으로 인촌을 설명할 수는 없다. 당시 그 보다 훨씬 부유한 사람도 많았지만 모두 인촌 처럼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인촌은 집안의 재산만으로 사업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경성방직을 만들 때 1인 1주 모집운동을 벌여 전국의 유지들을 끌어들였고, 보성전문학교나 동아일보 설립때도 국민주주 운동을 통해 소요 자금의 상당 부분을 마련했다.

◇인격이 재력 앞서
춘원 이광수는 1931년 쓴 「김성수론」에서 인촌의 성공을 「시세(時勢) 2+재력 3+인격 5」라는 공식으로 풀었다. 춘원 처럼 공식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인촌을 접한 많은 인사들이 인촌의 성공을 그의 인격에서 찾고 있다.
현민 유진오는 선비이면서 온후하고 성실한 인품에다 평생을 좌우명으로 삼은 「공선사후」(公先私後)에 입각한 정론과 정도를 걸었다고 인촌을 평가했다.
미당 서정주는『어려운 시대를 살던 동포들에게 타작마당이 되어주고 길도 되어주었으며 때로 냇물이 되어주고 논밭이 되어준 고향 같은 분』으로 그렸다.
인촌의 절약 정신은 잘 알려진 사실. 서울에서 고향을 찾을 때 5원을 아끼기 위해 20㎞거리의 정읍에서 줄포까지 걸었으며, 전차비를 아끼기 위해 학교까지 10㎞ 거리를 매일 걸어다녔다 한다.

◇人材 부자
인촌을 이야기 할 때 「인재의 거부」라는 말이 꼭 따라다닌다. 고하 송진우, 근촌 백관수는 평생 지기였으며, 현상윤·김병로·최두선·김준연·조만식·현준호·조소앙·김도연·홍명희 등은 일본 유학시절에 만난 인물들.
인재들의 뒷바라지에 돈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주변에 항상 사람이 모였던 이유가 될 것 같다. 인촌의 도움을 받은 확인된 사람만도 유학생 50여명을 포함 7백30명에 이른다는게 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승문씨의 이야기다.

◇정치인으로서 인촌
일제 식민지 아래 사업을 키우고, 이승만의 단독정부를 지지한 것이 진보적 연구자들로부터 「기회주의자」로 공격을 받기도 했다. 또 학병제, 징병제를 찬양한 글과 연설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체제내 민족운동을 일제에 타협적이라는 등식으로 연결시킬 수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급진적 사회주의자들도 후에 전향해 일제 총독 정치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교육 운동이야 말로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운동이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해방후 소용돌이 정국에서 인촌은 한민당 창당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민당에 대해서는 친일파와 지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결집한 보수적 성향의 「지주당」이라는 혹독한 비판이 나오기도 하지만 격동기 민주주의를 뿌리내린 긍정적 면도 무시할 수 없다.
허정은 인촌이 개인적 야심을 가졌다면 정치적으로 훨씬 큰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자리에 연연하지 않은 한국 현대사의 거인이었다고 술회했다.

인촌과 전북


인촌은 지역색을 초월한 정치인으로도 유명하다. 인촌의 주변에는 전국의 인재들이 모였고, 특별히 전북 사람이라고 대접 받았던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하 송진우나 근촌 백관수 등이 곁에 있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동문수학했던 특별한 관계였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치나 사업을 한 것이 아닌 전국을 뛰었던 상황에서 어쩌면 당연했을 지도 모른다.
그가 탄생한 인촌 마을의 이름을 딴 인촌이라는 아호도 대구의 지주며 서예가였던 서병오가 붙여준 것으로 전해진다.
오늘날과 같은 시각으로 지역을 따지던 시대가 아니었고, 당시 시대적 상황 또한 당장 국가와 민족 문제가 벅찬 현실 앞에 지역을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사정에도 불구하고 고향인 전북에 남긴 특별한 것이 없는 점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기도 한다. 대대적인 교육 사업을 벌였으면서도 정작 지역 교육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는데 대한 서운함일 것이다.
이는 물론 어디까지나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다. 인촌은 실물로 지역에 남긴 것은 없지만 지역민들에게 자긍심과 긍지를 갖게 한 보이지 않은 보다 많은 무형의 자산을 남겼다.
인촌이 세운 고려대에 이지역 출신이 유달리 많았다는 사실이 이를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인촌 추모사업

「인촌은 죽어서도 말을 한다.」 필생의 사업으로 이룩한 학교와 언론을 통해 그의 유지와 유훈이 그대로 이어지는 것을 두고 나오는 말이다.
그를 기리는 많은 사업도 이루어졌다. 고려대내에 인촌기념관이 세워졌고, 재단법인의 인촌기념회도 만들어졌다.
특히 인촌 사후 각계 인사를 발기인으로 한 인촌기념회는 인촌의 유지를 이어가는 여러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인촌문화상 제도도 그 하나. 매년 우리 사회에 공헌한 3~4명의 인물을 선정해 부문당 3천만원씩 상금을 수여하는 것으로, 12회째인 지난해에는 원경선 풀무원장, 김춘수 시인 등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또 인촌 장학금 제도로 장학 사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옥스포드 대학원 코스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인촌기념펠로」 장학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장학기금 등은 각계에서 출연한 70억원의 재단기금으로 운영된다.
인촌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또하나가 고창군 부안면 인촌 마을에 있는 생가다. 인촌 생가는 그가 태어나고 17세때 부안 줄포로 이사갈 때까지 살았던 곳으로, 현재 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14채에 이르는 기와집이 당시 부유했던 인촌 집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77년 이후 생가를 관리하고 있는 김병포씨(63)는 『유치원생부터 대학 교수에 이르기까지 매년 1만명 정도의 관람객들이 생가를 찾고 있다』고 했다. 과거 약간의 유품이 있었지만 도난 사건 이후 모두 인촌기념관으로 옮겨가 탁본 등으로 채워진 것이 다소 아쉽다.
이호종 고창군수는 군에서 생가 관리를 맡고, 미당 문학관과 선운산 등을 연계하는 관광코스로 개발하는 것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