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유학자 하서 김인후  영세 흥왕의 터를 잡은 하소부인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1 단종에 충효를 다하신 손암 김신덕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2 남문창의 맹주로 활약한 오천 김경수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3 임진란에 종군하신 취옹 김남중
단종에 충절한 복양제 김수노 삼양사 창립등 대사업가 수당 김연수
명.황제를 감동시킨 백암 김대명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 가인 김병노
진주성에서 순절한 판관 김천록 한국 지성의 거목 남제 김상협
현대사의 거인 인촌 김성수 추효업적을 이룩한 맥촌 김형지
세계의 언론인 일민 김상만 학문, 덕행, 효를 다하신 선조들
과거에 급제하신 선조 사환들 호남 여인열전 여흥민씨부인
난중에 정절을 지킨 열녀 할머니들  갤러리 게시판
너는 커서 河西가 되라

 임진란에 종군하신 휘 남중(南重)

正公(문정공)의 嗣孫(사손)으로 선조3년(1570년6월20일) 맥동에서 낳으시고, 인조 14(1636년)년에 돌아가심으로 66세의 수를누리시고,字는 汝兼(여겸),號는 醉翁堂(취옹당)이시다.후세에 존대하여 취옹공이라 하였다.
文章氣節(문장기절)이 밝고 맑으며 立論(입론)이 고상하셨다.

슬은 宣敎郞(선교랑:종품 문관))으로 임진왜란시 취옹공 께서는 의병을 일으켜 출병하셨는데,계속 왜병들과 싸우시다가 선조때 정유재란을 맞게되니 군량이 떨어져 용병이 어렵게 되자 ,병사 몇사람을 시켜 집으로 가서 급히 군량을 수집하여 보내라는 전갈을 보내었다.이를 접한 부인은 친가에 가시기로 하였다.그것은 임진 왜란시 선조 대왕께서 의주로 파천 하실때,친정 아버지 고봉 장자 함재효증께서 전라도 라주를 기점으로 하여 의곡 3,300석을 수집하여 의주로 봉송 하였다는말을 듣고 ,그 군량이 남앗으면 여기에 충당 하려고 어린 두아들과 함께 친정 (임곡:너부실)으로 가시는 도중에 장성 황룡강 만추정에 이르자 왜병들이 달려들어 팔을 잡고,행패를 부리므로 품속에 간직 했던 은장도(비수)를 꺼내어,잡힌 팔목을 내리쳐서 팔은 잘려 다리위로 떨어지고 몸은 강에 투신하여 자결로서 입절 하시고 陪行(배행)한 노비가 수렴한 팔을 정중하게 간직 하였다가.취옹공께서 9년만에 집으로 돌아오시니,이를 선영 계하에 장사하였다.후세에 이를 일러 일비장이라고 하였으며,나라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정려가 내려졌다. 종군하여 공을 세워 光國原從勳(광국원종훈)에 오르셨다.전라도 유림들이 취옹공을 추모하여 장성 晦溪祀(회계사)에 배향 되시고,묘는 순창군 복흥면 華蓋山(화개산) 壬坐原이다.

머니는 행주 기씨 高峯(고봉:奇大昇의 號) 선생의 따님으로 선조2년에 나셔서 선조30년(1597년),28세의 젊은 나이에 순절 하셨다.기씨 께서는 낳으신 아드님이 두분 계셨으나 왜놈의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하서라는성으로 살고 있다고 하나 말로만 전해올뿐 기록이 없어 알길이 없다(倭政時代에 河西性을 쓰는 巡査 大長이 한국에 나와서 실제로 근무했다는 이야기가 傳한다)

뒤 취옹공은 함풍이씨(함평이씨:선조19년 1586--인조26년1648 62세 졸)를 재취 하시어 亨福(형복) ,亨祿(형록),亨祐(형우),亨祉(형지) 等 4兄第를 두심으로서 多福 하셨을 뿐 아니라 家門으로서도 이 代부터 中派는 번창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