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유학자 하서 김인후  영세 흥왕의 터를 잡은 하소부인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1 단종에 충효를 다하신 손암 김신덕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2 남문창의 맹주로 활약한 오천 김경수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3 임진란에 종군하신 취옹 김남중
단종에 충절한 복양제 김수노 삼양사 창립등 대사업가 수당 김연수
명.황제를 감동시킨 백암 김대명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 가인 김병노
진주성에서 순절한 판관 김천록 한국 지성의 거목 남제 김상협
현대사의 거인 인촌 김성수 추효업적을 이룩한 맥촌 김형지
세계의 언론인 일민 김상만 학문, 덕행, 효를 다하신 선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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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커서 河西가 되라

동방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


1.동방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

인후(金麟厚) 1510(중종 5)~1560(명종15)
조선의 문신. 유학자.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澹齋),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고, 1540년(중종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후에 정자(正字)·박사(博士)·설서(說書)·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부모의 부양을 위해 옥과 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명종이 즉위하고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후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長城)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정진,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반대하여 이기(理氣)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했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성(長城)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峰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제향(祭享), 시호는 문정(文正).

(하서 김인후 선생은 중종5년(1510년) 이곳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태어나 명종15년(1560년) 51세를 일기로 별세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유학자였다. 김인후는 8세에 조광조의 숙부(叔父)인 조원기가 전라감사로 있을 때 신동이라고 칭찬했을 정도로 뛰어난 자품을 타고났다. 10세에 전라감사로 부임한 모재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경기도 이천으로 귀향을 가자 18세 때까지 독학으로 사서오경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태극도설에 정통하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와 눌재(訥齋) 박상(朴祥)이 기묘사화로 광주에 귀향하자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중종26년(1531년) 22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퇴계 이황 등과 교류하였는데 퇴계와는 매우 돈독한 친교를 맺었다. 후일 퇴계가 "함께 교유한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했을 정도다. 중종35년(1540년) 31세 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게되어 선망의 대상이었던 호당(湖當)에 들어갔다. 호당에는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박형수, 정유길 등 희대의 명사들이 13명이 있었는데 이들이 이때 교유하면서 사상적 토론을 하여 성리학 이론을 확립한 것이 조선 성리학 형성에 큰 자취를 남긴 것이다. 중종38년(1543년) 34세에는 홍문관박사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 되어 후에 인종(仁宗)이 되는 세자와 깊은 사제(師弟)의 연을 맺게 된다. 세자는 하서의 학문과 도덕에 깊이 감복하여 집에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주자대전 한 질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1543년 6월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여 기묘사림(己卯士林)들의 신원을 호소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향리로 내려갈 것을 청하였다. 12월 옥과현감을 제수받아 고향근처로 돌아왔다. 중종이 승하하고 제12대 인종이 즉위하자마자 불과 8개월만에 31세로 죽자 하서는 일체의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왔다. 그 후 인종의 기일이 되면 집 남쪽 산중에 들어가 종일토록 통곡하고 돌아오기를 평생을 한결같이 하였다. 하서는 순창 점암촌에 초당을 세우고 주자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하였다. 48세 때에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과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를 저술하였으며, 일재 이항과 고봉 기대승 등과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놓고 논변을 하였다. 후에 퇴계와 고봉간의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때 고봉의 이론은 하서와의 논변을 통해 정립된 이론이라고 보고 있다.
하서의 학문은 성리의 정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하서는 또 시문에도 능해 당대의 유명한 면앙정 송순과 교유하였으며 10여권의 시문집을 남겼다. 1560년 5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인종에 대한 절의의 표시로 임종 후에도 옥과현감 이후의 관직은 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하서는 정조20년(1796년)에 문묘에 배향 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필암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겨진 곳으로 호남의 대표적 서원이다.)

2.道와 義로 일괄한 「士林의 큰별」[河西 金麟厚(김인후)]

西 金麟厚 유교는 인간의 모든 이상을 인간 자신의 힘으로 현세 속에서 실현시키려는 인본적 현세간(現世間)주의다. 따라서 유교는 피안과 초월을 지향하는 종교들과 크게 다르다. 유교의 이상은 단순한 인간의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천(天)으로부터 품부받은 덕성을 잘 갈고 닦아 대인군자가 되어 천지만물과 함께 어우러져 도덕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므로 그 목표는 어느 종교보다도 높고 그 목표에 이르는 길 또한 어떤 언행보다도 무겁고 먼 것이었다.
도불(道佛)은 현세간을 쉽게 부정하고 자기 세계나 경지로 홀가분하게 나아가는 길이 있지만 유교는 끝까지 현세간을 버리지 못하고 바로 그 현세간을 이상 세계로 교화해야 하므로 숙명적으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게 마련이다. 유교의 정치사가 의외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 격돌로 점철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조는 유교로 세운 나라였다. 그러나 건국 과정부터 이상과 현실이 격돌하고 부모 형제가 의리와 인륜을 저버린 채 왕권을 놓고 상잔(相殘)하는 반유교적 작태를 드러냈다. 이는 조선조가 끝날 때까지 되풀이되었으며 늘 이상과 원칙이 현실과 변칙 앞에 참담히 무너지는 비극이 연출되었다.

렇게 이상과 현실이 갈등 격돌하는 정치현장에서 자기 소신을 펼치려다 희생된 인물로 정도전(鄭道傳)과 조광조(趙光祖)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성패에 대한 평가는 자못 대조적이다. 정도전은 분명 조선조를 통틀어 가장 성공한 정치가다. 그는 한 나라를 설계 건설하여 이념에서 제도와 경영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각과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소신을 한껏 펼쳤다. 하지만 그는 5백년 동안 폄훼된 채 묻혀 지내야 했다. 반대로 조광조는 유교본위정치인 지치주의(至治主義)를 내세워 「군왕을 요순(堯舜)으로 만들고 백성을 당우삼대(唐虞三代)에 살게 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비명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는 50년만에 복권되어 문묘에 배향되고 도학의 표상으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현실과 변칙에 영합한 정치인은 성공해도 높이 평가받지 못하고 이상과 원칙을 고집한 정치가는 비록 실패했어도 추앙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현실이 어지러울 때 지혜를 주고 앞날이 암담할 때 바른 길로 인도하는 등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조광조를 그토록 추앙하던 사림은 지치주의를 계승하기보다는 그를 화근으로 보고 논변을 일삼아 점차 활력을 잃어갔다. 세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이상정치에 대한 신심(信心)을 잃고 좌절과 허탈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광조의 지치주의가 점점 빛을 잃어갈 때 한가닥 희망을 걸고 도학과 지치주의 노선을 내걸고 나선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다.

인후가 당시 선비들이 화근시하는 조광조의 지치주의 노선을 다시 밟은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그의 성정(性情)이 강개하고 학덕이 돈후한 데에도 기인하겠지만 그보다는 학맥과의 깊은 관계 때문이다. 그는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다. 김안국은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金宏弼)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김굉필은 바로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순의 조선 성리학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인물이므로 김인후는 도통의 직계이다. 그리고 스승의 형제나 다름없는 조광조와는 사숙질(師叔姪)이 된다. 때문에 하서는 정면으로 뛰어들어 그 어려운 유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 조광조를 죽인 중종에게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말하고 희생자들의 신원(伸寃)을 주청한 것은 이러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가 세자때 가르치고 인도하던 인종이 등극하자 무엇보다도 먼저 신원되었으니 인종과 하서간의 묵계를 알만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인종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도 조광조의 지치주의는 다시 꽃을 피울수있었을것으로짐작된다.

리는 그 가능성을 김인후 학문과의 만남에서 찾을 수 있다. 학문적으로 하서는 이기(理氣)를 포괄한 대심(大心)철학자다. 배타보다는 포괄, 분석보다는 회통을 중시했고 모든 사물을 같은 생명차원에서 교감했다.

그의 학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심(心)은 일신만사(一身萬事)의 주재자다. 그러나 심만으로 주재가 되는 것은 아니고 심에 내재한 이(理)를 타야만 주재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심을 정위(正位)시켜야 하는데 이 공부가 구방심(救方心), 입대본(立大本)의 경(敬)이요, 밝혀진 대심(大心·至理)을 다시 밖으로 확충해나가는 과정과 추진력이 수도요 지성(至誠)이다. 이 지성으로 진기성(盡己性)―인성(人性)―물성(物性)해서 천지의 화육을 돕고 천지와 상삼(相參)함으로써 우주생명의 대역사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지는 부모요 인간은 형제며 만물은 동포다. 어찌 이물(異物)로 대할 수 있겠는가. 오직 순수감정으로 교류하고 사랑할 뿐이다. 천지를 슬퍼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갔을 때 정반(正反) 시비(是非) 득실(得失) 호오(好惡)가 가려질 것이니 여기서 정치가 시작된다」.

하서가 단순한 성리학자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도학자임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그의 학문과 사상은 과정을 중시하는 김안국의 온건한 학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조광조의 과격과 급진 그리고 고집과 배타 등의 약점을 보완하기에 넉넉하다.

유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국가 경영의 중심무대인 정치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고 특히 군왕과 의합(意合)해야 한다.

인후는 이러한 조건을 다 갖춘 행운아였다. 성균관에서 퇴계(退溪)를 비롯한 많은 현능(賢能)들을 만났고 특히 스승의 배려로 세자 보덕(輔德·세자를 가르치던 벼슬)이 되어 다음 정권을 잡을 세자와 군신관계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서로 경애하고 의기 투합했다. 이는 김인후가 장차 정치이상을 펼치는데 더없이 좋은 기회요, 절대적인 보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만복(滿腹)의 열정과 경륜, 신심과 희망은 인종이 1년도 못되어 승하함으로써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을 무엇으로 감당하랴. 그후 그는 일찍이 모실 이를 잃어버린 청상(靑孀)으로 자처하며 일체의 벼슬을 거부하고 절개를 지켰다. 그래서 그에게는 도의(道義)와 문장(文章)에다 절의(節義)가 더해진다. 그는 시와 술로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다 병들어 50세를 일기로 통한의 생을 마쳤다. 다음은 그가 인종을 애원(哀怨)한 나머지 단장의 피를 토하면서 쓴 사모곡이다.


「임의 나이 삼십을 바라볼 때에
내 나이 서른하고 여섯이었소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시위 떠난 화살처럼 떠나간 임아
내 마음 돌이라서 구르질 않네
세상사 흐르는 물 잊혀지련만
젊은 시절 해로할 임 여의고 나니
눈 어둡고 머리 희고 이가 빠졌소
슬픔 속의 봄 가을 몇번이던가
아직도 죽지 못해 살아있다오
백주는 옛대로 물가에 있고
고사리는 해마다 돋아납니다
오히려 부럽구려 주나라 왕비
생이별이야 만난다는 희망이나 있으니」


현실의 좌절 詩로 승화
「남쪽에는 하서」. 16세기 도학의 거봉 하서 김인후를 일컫는 말이다.
나이 다섯살때, 누군가 「하늘 천(天)」을 주제로 글을 지어보라 했다. 주저없이 곧 읊기를 「형체는 둥글어라/하 크고 또 가물가물/넓고 넓고 비어 비어/지구 가를 둘렀도다/덮어주는 그 중간에/만물이 다 들었는데/이 땅 사람이 어찌하여/무너질까 걱정했지」.

이처럼 하서는 타고난 시인이었다. 남긴 작품만 무려 1천6백여편.

그러나 그의 시성(詩性)은 그저 개인적 천품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호남 강호가도(江湖歌道) 시단의 독특한 미적 정서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정치적 현실에 대한 비분을 함께 표출했기에.

하서가 본격적으로 시에 몰두한 것은 인종의 승하를 계기로 속세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 칩거하면서부터.

인종 승하 이후 매년 인종의 기일이 돌아오면 고향집 뒷산에 올라 술 한잔 마시고 한번 곡하고, 돌아와 시를 지었다.


「그대 나이 삼십이 되어가는데
내 나이는 서른이라 여섯이로세
새 즐거움 반도 다 못 누렸는데
한번 이별 활 시위에 화살 같아라
내 마음은 돌이라서 굴러갈건가
세상일은 동으로 흘러가는 물
한창때 해로할 이 잃어버리고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 희었네」

인종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한 「생각한 바 있어(유소사·有所思)」의 한 대목.
인종이 떠나간 세상, 뒤틀린 현실에 대한 분노와 좌절. 하서는 취흥으로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시종 격을 잃지않았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를 「현실의 좌절감을 흥취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시인」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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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북구 운암동 광주어린이대공원 중심부에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 厚·1510∼1560)선생의 동상이 있다.
전남 장성 맥동에서 태어난 하서선생은 조선 중기 을유사화 등 4대 사 화(士禍)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학자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고 성리학의 한 줄기를 이룬 큰 스승. 선생을 가리켜 정조(正祖)는 “도학과 절의 문장 어느 하나라도 갖추지 않음이 없는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고 칭송하며 ‘문정’(文正) 시호(諡號)를 내렸다.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좌우에 둔 높이 2.5m의 좌상은 유작을 새긴 6폭 석조병풍과 그 뒤에 늘어선 10여그루의 소나무와 어우러져 한눈에 선생의 높은 학식과 덕망을 느끼게 해 준다.

석조병풍에는 세자시절 인종(仁宗)의 스승으로 인종이 그린 그림에 시 를 지어 넣은 ‘묵죽도’와 도학사상을 집약도해한 ‘천명도’, 한시 ‘ 자연가’를 비롯한 작품 9점이 새겨져 있다.

이 동상건립사업은 91년 울산 김씨대종회와 하서기념회가 주축이 돼 동 상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 일민 김상만(一民 金相万·94년 작고)동아일보 사 명예회장이 위원장을 맡으면서 본격화했다.

광주시는 1백43평의 건립부지를 제공했으며 건립기금모금은 울산 김씨 종친회, 제작은 조각가 김영중(金泳仲)씨가 맡아 92년 10월30일 제막했다 . 제막식에서 일민선생은 “조선조 문민정치와 도덕적 규범이 선생을 필 두로 한 시대의 명현들에 의해 이룩됐음을 유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